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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고, 작가, 편집자이고, 장애인권운동가, 페미니스트인 Elsa Sjunneson-Henry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형태] 칼럼 번역
번역기에 의존했습니다. 의역과 오역이 있음을 염두하고 읽어주세요
원글 tor.com
엘사의 트위터 @snarkbat
저의 트위터 @acrosstheprism
( ) < 엘사가 괄호를 치고 쓴 글
(*) < 저의 주석
나는 사람들 속에 속한다
장애와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형태]
[셰이프 오브 워터]는 나를 좀 덜 인간인 것처럼 만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셰이프 오브 워터]에 관해 좋아할 것들이 많다. 주인공들은 모두 아웃사이더들이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작은 신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 욕망의 대상으로 표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화가 주류 영화에 나온 건 처음 본다. 이 영화는 내 몸에 대한 내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크린에 묘사한 유일한 영화들 중 하나다. [작은 신의 아이들]은 1986년에 만들어졌다. 31년간의 영화 역사 중 그게 전부였다.
-밑으로 스포일러 주의-
한 장면에서, 화가 난 '진짜' 괴물이 묻는다. "이 여자가 뭐라고 한 거야?"
우리의 영웅 엘라이자는 그의 사랑을 죽이려한 남자에게 침착하게 "Fuck you"를 보였고, 친구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어요."라고 통역했다. 유쾌한 장면이었다.
장애인 여주인공이 애인에게 다정하게 포옹을 받는 장면도 있었다.
비장애인 남자가 장애인 여주인공을 위협하면서, 내가 살면서 직접 들어본 적 있는 모욕적인 말을 내뱉는 장면도 있었다. 리얼했다.
그러나 그 괜찮은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셰이프오브워터]에는 싸워야 할 지점이 있다. 장애인 여성의 성적 욕망과 성적 활동, 또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은 스크린에서 수 년 만에 처음으로 보인 것인데, 그게 괴물을 통해서라니.
'몬스터후드'와 장애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있다. (*몬스터후드는 한국어로 번역할 단어가 없지만 악역을 괴물처럼 흉측하게 디자인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스노크(*스타워즈 악당 말하는 듯)같은 캐릭터는 사람이 되기 힘들며, 그 상처로 얼룩진 얼굴은 관객에게 그들이 악마라는 신호를 보낸다. 장애와 흉한 외모는 하나로 묶여왔다. 엘라이자의 목에 난 흉터는 아가미로 읽힐 수 있고, 이건 그의 장애 자체가 '몬스터후드'라는 힌트가 된다.
[셰이프오브워터]의 엘라이자와 똑같이, 나는 장애가 없는 삶은 살아본 적이 없다. 우리 둘 다 통역해줄 무엇이 필요한 세상을 살고 있다. 엘라이자는 수화를 모르는 사람과도 소통 해야 한다. (엘라이자는 ASL을 쓰지 않지만 작 중 표준 ASL 핑거 스펠링을 몇 번 쓰긴 한다.) 나는 보청기를 쓰고, 언젠가 수화를 쓰게 될 거고, 자막 글씨가 너무 작은 영화를 볼 때는 자막을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 영화는 그 경우는 아니었지만.)
[셰이프오브워터]는 우리에게 누가 괴물인지 생각해보라고 묻는다. 그 괴생명체는 신인가? 그 장애인 여자는 괴물인가? 아웃사이더인가? 주인공은 같은 종족에게 사랑받거나 이해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괴물들만이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이 영화의 대답은 "그는 그와 같은 종족(*인간)에게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없어." 그리고 "엘라이자는 아웃사이더야, 괴물이야. 변종이야."다. 엘라이자는 그가 사랑하는 수생 괴물과 함께 물 밑으로 갔다. 그가 살았는지는 확실히는 모르지만, 사실상 모든 요소는 그가 영화 마지막에 죽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그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영화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다른 평범한 영화들과 똑같은 결말이 된다. 절대 피할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엘라이자가 죽은 것, 안 죽은 것, 두 해석 다 나쁘지만, 나는 좀 덜 화나는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를 보며 운 장면이 있다. 그 순간에 너무 깊이 내적갈등을 했기 때문이다. 엘라이자는 친구 자일스와 괴물을 구출하는 건으로 싸우는 장면에서 엘라이자는 자일스가 그의 수화를 입으로 말하게 하고, 그렇게 자일스가 그의 말을 듣게 하여 이해하도록 만든다. 엘라이자는 이 대화에서 장애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말한다. 사람들이 엘라이자를 응시할 때, 엘라이자를 '다르게' 본다고. 이 부분은 사실적이었고, 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그 때였다. 엘라이자가 자일스에게 큰 소리로 말하도록 할 때. "그는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걸 몰라."
사회는 장애가 우리를 하찮게 하고, 우리를 평범하지 못한 인간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사회는 나를 볼 때 내가 한 쪽 눈으로만 보고 한 쪽 귀로만 듣는 것만을 바라본다. 사회는 내가,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의 절반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내가 그들보다 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 몸에 살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장애를 가진 몸에 살 바엔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나는 전체적인 것 보다 덜 느끼지 않는다.
내 깊은 갈등은 여기서 일어났다. 난 비장애인들이 날 반쪽짜리로 본 다는 걸 뼛속깊이 알고 있었다. 내가 이런 미디어를 싫어하는 이유다. 우린 우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엘라이자가 죽었을 때 난 전혀 놀라지 않았다. 제작자는 당연히도 엘라이자를 죽이고, 물속에서만 부활하게 하고, 그를 유일하게 욕망했던 남자와 함께하게 했다. 사회는 당연히도 수면 위에서 다른 인간들에게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장애여성보단 차라리 물 밑에서 그를 사랑해주는 유일한 생명체와 함께 사는 장애 여성을 상상할 것이다.
내가 "이건 판타지일 뿐이야"하고 지나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못하겠다. 장애여성이 비장애인 파트너의 성애의 대상이 되는 걸 말 그대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지나치지 못하겠다. 내 신체가 덜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 생각하게 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 영화가 잠재적으로 엘라이자는 인간이 아닌 그와 같은 괴물과 파트너가 되는 게 분수에 맞다고 말한다는 걸 읽어 낸 지금 상황에서는.
만약 장애를 가진 여자 배우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나온다면, 그들이 핫한 괴물들과 파트너가 되는 것은 문제될 것 없다. 하지만 우린 아직 그런 세상에 살지 않는다. 비장애인 주인공들은 언제든 괴물과 파트너가 되도 된다. 그들은 괴물과 파트너가 되더라도 비장애인에게 사랑받으니까. 장애인 주인공 영화와 장애인의 몸을 욕망하는 사람 중 비장애인과 '괴물 애호가'의 비율이 같아지기 전까지는, 난 편해질 수 없다.
SF, 판타지, 호러는 더 잘 할 의무가 있다. 작가로서, 소비자로서, 크리에이터로서, 우리는 더 나은 표현을 강요하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고, 사회적 편견과 단절되어야 한다. 우리가 물고기 괴물이 인간에 의해 사랑받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 장애 여성이 사람에 의해 사랑받을 수 있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다. 엘라이자는 장애가 있지만, 그 역을 맡은 배우 샐리 호킨스는 비장애인이다. 장애인 배우들은 계속해서 추월당하고, 장애인캐릭터는 비장애인에게 연기로 '도전해볼만한 역할'로 비춰진다. 배우가 장애인이었다면, 특히 의사소통을 위해 매일 유창하게 수화를 쓰는 누군가였다면 이 영화는 훨씬 더 강력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갈 때 쯤 나오는 뮤지컬 장면은 캐스팅 된 게 샐리 호킨스였기 때문에 볼 수 있던 것이다. 엘라이자가 "You’ll Never Know How Much I Love You"를 부르며 괴생명체와 함께 춤추는 그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툭 튀어나와 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장애 여성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 여성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할리우드는 장애인 캐릭터를 과소평가하여 '극복'하는 꿈을 보여주는 것을 멈춰야한다. 이런 장면은 신체적 장애를 가진 캐릭터에게만 삽입된다. 이는 비장애인 관객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나는 나의 삶을 희생시킴으로 편해지는 비장애인 관객들에게 지쳤다.
나는 두 눈으로 보는 것이나 보청기를 끼지 않고 듣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갈망하지 않고, 나의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도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댄스 장면 때문에 수화, 장애에 대한 믿음, 엘라이자의 수화를 통한 말들이 가졌던 힘이 깨져버렸다.
나는 이 영화가 내가 평생 동안 함께 살아온 장애인 차별주의자들과, 프릭쇼 내러티브에 대항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프릭쇼 내러티브는 한국어로 번역할 말이 없지만 이상한 사람만 모여 있는 집단을 비웃는 서사를 말하는 듯하다) 장애인 차별주의와 프릭쇼 내러티브는 이론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다.
지난 휴일 난 파티에 갔다. 그 곳에서 한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장애인이 악역으로 캐스팅되는 건 진화심리학적으로 비대칭인 사람들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비대칭인 내 눈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과는 없었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내 남편이 가까운 곳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인간세계에 포함되어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다. 그러나 [셰이프오브워터]는 내가 수면 아래에만 있어야한다는 내러티브를 강화했고, 그런 내러티브가 딱 맞는 시기에 상영되었다. (*단 한 번도 장애여성이 비장애인 파트너의 성애의 대상이 되는 걸 본 적 없는 지금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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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Monsterhood 몬스터후드와 Freak show 프릭쇼에 대해 의견을 남겨주셔서 첨부합니다.
"monsterhood와 장애가 연결되어있다는건 장애가 항상 괴물처럼 묘사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장애가 악역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좋은 비유로 쓰인다는 얘기도 되고요. ( '좋은' 비유는 악역을 설정할때 게으르게 장애에 부과되는 사회적 낙인을 이용해온 비장애인 내러티브생산자들의 생각을 비꼬는 말입니다;)
프릭쇼 서사는 저번에 <위대한 쇼맨> 영화가 개봉되면서 많은분들이 정보를 올려주셨지만 19c~20c초까지 인종, 장애, 퀴어 등의 타자화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freak(괴물)로 규정해 볼거리로 전락시킨 프릭쇼를 가리킵니다. 즉 미디어에서 장애를 그려내는 방식이 '우리 비장애인 관객'과 대비되는 볼거리로서만 배치하여 관객들에게 '나는 저런 타자가 아니다'는 안심을, 그래서 장애인을 맘껏 동정할수있는 특권을 주는 식의 서사를 프릭쇼 서사라고 불렀다 이해했습니다. "